번호표 발권기를 놓으면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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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점검은 한밤에 부탁해요

4월 4일, 남반구의 뜨거운 태양이 밝았다. 열하루 밤을 묵었던 게스트하우스의 사모님이 챙겨주신 김치와 깍두기를 트렁크에 고이 담고 고정숙소의 보증금과 4월 임대료를 지불하기 위해 은행으로 갔다. 오전 9시 반에 나가서 10시 반까지 이체하고 12시에 숙소에서 열쇠를 받으면 되는, 남아공 타임을 참작해도 트렁크 안 김치의 신선함을 유지하기에 전혀 무리가 없는 일정이었다. 盡人事 待天命. 사람 일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터진다. 공교롭게도 내 앞에서 은행서버가 다운되었다. 늦어도 12시까지만 그늘진 서늘한 곳에 주차하면 신김치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땡볕에 은행 지점마다 떠돌게 되었다. 그날의 다운이 정기점검은 아니었기를. 나를 비롯한 수많은 고객이 은행에서 발 동동 굴리며 되지도 않는 인터넷뱅킹을 붙들고 애꿎은 직원만 닦달하고 있었다.

 

번호표 발권기를 놓으면 어때요

전일의 해프닝을 뒤로 하고 당일 할 일은 전일에 미리 해보자는 교훈을 떠올리며 이틀 연속 은행을 찾았다. 이날은 차량 구매대금 송금을 위해 이체 한도를 늘리러 갔다. 집약적 삶에 익숙한 한국인의 시선으로는 공간에서부터 비효율이 넘치는 은행 창구에서 여전히 하염없이 기다리며 주변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저 사람은 녹색창구로 갈 것 같이 생겼어. 저 사람은 일행이군. 노란창구를 기다리는 사람은 나뿐인 것 같군. 기다리는 손님보다 창구에서 일 보는 손님을 훨씬 배려하는 이곳에서는 대기하는 시간이 고역이다. 10여 분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창구 하나가 비었다. 대기석에서 벌떡 일어난 나의 어깨에 누가 손을 얹었다. 이보게. 내가 먼저 와있었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데 창구 직원이 심판의 깃발을 흔들었다. 이분이 먼저 오신 것 맞습니다. 아, 네.

 

보안이 중요하다

체감상 30분쯤 기다린 것 같다. 밉쌀 맞은 아저씨가 자리를 뜨고 드디어 창구 직원이 나를 부른다. 눈치껏 살핀 대로 노란창구를 기다린 사람이 나뿐이었는지, 먼저 저지한 것이 미안해서 이번에 부른 건지는 알 수 없다. 부르니까 간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전에, 대기하는 인원을 찍으려고 전화기의 카메라를 돌렸는데 각도를 잘못 잡아서 셀카를 찍고 말았다. 거대한 보안직원이 다가와서는 지우라고 해서 바로 지웠는데 기본 갤러리에 남아있었다. 보안상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곳임에도 꼭 찍어두고 싶다면 사진을 이중으로 저장하는 카메라 어플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능범죄에 대비하여 보안업체는 IT에도 밝아야 한다.

 

처음 이 나라에 와서는 일이 늦어지는 이유가 숙련되지 않은 노동력 때문인 줄 알았는데, 은행을 몇 번 오가며 보안에 대한 남다른 절차가 한몫 거들고 있음을 발견했다. 해외송금이나 이체한도 증감 같은 사안에 대해서는 본인 확인이 지점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본사에서 재확인하는 절차를 거친다. 지점 직원이 시스템에 입력한 내용을 바탕으로 본사 콜센터에 전화를 걸어 손님과 전화연결을 통해 본인의 의사가 맞는지 확인을 한다. 콜센터. 여기도 오래 걸린다. 11시 50분 ARS에서 대기하라는 안내가 흐른 뒤 12시 34분에야 콜센터 직원과 연결이 됐다. 스피커폰으로 ARS 안내를 반복 청취하며 40분 넘게 점원과 어색한 시간을 보냈다. 보안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염없이 기다리는 곳은 은행뿐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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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lkom. 유선전화망을 독점하는 대한민국의 KT와 같은 곳이다. 이곳에서도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는 안내를 들었다. 다만 은행처럼 그 자리에서 지우라고 하지는 않는 것을 보니 사진 찍는 차이니즈가 미심쩍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안정적인 인터넷 환경을 위해 ADSL을 신청하러 갔는데 접수하는 도중에 은행에 이어 여기서도 시스템 에러가 났다. 정상 접수까지 이틀이 걸렸고 집으로 전화선을 연결해줄 기술자가 언제 방문할지는 일주일이 걸려야 알 수 있다고 한다. 다음 주 수요일이 무척 기대된다. 왠지 한 달은 걸릴 것 같은 예감이다.

201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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