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5: 흙먼지 말아 올리며 다시 오다

아마도 작가는 두 영웅에게 한 권씩의 분량을 할애하여 독자를 흠뻑 매료시킬 요량이었나 보다. 5권의 시작에서 한신을 대장군으로 삼은 한왕이 한번 출정을 하더니 한 권을 마무리할 즈음에는 이미 초나라 수도까지 점령을 해버렸다. 한편으로는 패왕에게 시해된 의제를 받들어 대의명분으로 세력을 더하고 한편으로는 무력으로 적을 흩어버리니 한왕은 주인 없는 빈 산을 훑듯 패왕 없는 팽성까지 한달음에 이르렀다. 6만으로 출정한 군사가 팽성에 이르러 10배가 되도록 패왕은 산동의 제나라에 발이 묶여 꼼짝을 하지 못했을뿐더러 그 포악한 성미로 말미암아 제나라의 늪을 도무지 빠져나올 성싶지가 않았다.

한왕이 팽성에서 한바탕 봄꿈에 빠지고 패왕이 두더지 잡듯 제나라 유민군을 들쑤시고 있는 상황에서도 두 영웅을 이야기하는 초한지의 시선은 이전의 기조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낙천적이고 재물과 여자를 좋아하는 한왕은 미화되고 제나라 정벌에 나서 반군을 생매장하는 가운데 점점 거세지는 저항에 부딪는 패왕은 그 평가에 있어 본전도 못 찾는 느낌이다. 그러나 여전히 천하 쟁패에 대한 열망과 군사를 부리는 능력은 패왕이 앞서 있었고 그에 비하면 한왕의 행보는 그 방향에 있어서나 50만 제후군을 다룸에 있어 미숙한 면모를 보인다. 나이와는 정반대로 패왕이 오히려 구시대의 방식을 따르고 너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었다는 것이 흠이었을까.

한왕이 패왕과 달리했던 것을 승자의 덕목이라 한다면 세상은 실로 인간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겠다. 한왕의 방식은 구시대의 것과 달랐고 잣대는 유연했다. 본인의 능력보다는 신하의 능력을 높이 사 의지하였고 그것이 어떤 국면에서는 한왕의 독자적인 판단 때문에 위기에 봉착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너무 엄격하지 않고 약간은 나사가 풀린 듯한 한왕의 사람 됨됨이가 그로 인해 오히려 능력 있는 인재를 부르고 적소에서 능력을 펼칠 수 있게 하는 큰 그릇으로서 역할을 했다 하면 나 역시 초한지의 시선에 익숙해진 탓일까. 흙먼지 말아 올리며 다시 온 한왕이 자꾸 날 닮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데, 나는 어떤 대의명분으로 흘러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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